길가에서 | 이인호목사 칼럼

20100822 - "기다림의 즐거움"

가족이 물놀이를 갔습니다. 인공적으로 만든 물놀이 기구들을 즐기는 곳입니다. 별로 내키는 것은 아니었지만 청년인 아들들에게 맞추다보니 선택의 여지가 그렇게 많지 못했습니다. 방학을 맞아 어린이들과 청소년들 그리고 청년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제 나이보다 많으신 분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끔씩 연세 드신 분들도 보이긴 했습니다만, 아마 저와 비슷한 처지로 자녀들을 따라오신 듯이 보였습니다. 인공적으로 만든 파도타기, 역시 인공적으로 만든 시내를 따라 구명조끼를 입거나 튜브를 타고 흘러가기 등은 순서를 기다리지 않아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 미끄럼틀, 서핑 등 스릴을 즐길 수 있는 기구는 장사진을 이루어 기다린 다음 탈 수 있었습니다. 저는 물 미끄럼틀 한 가지를 타고 기권하고 말았습니다. 1~2분 미끄럼을 타고 끝나는 것을 한 시간 반 동안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와서 지루하게 줄 선다고 해서 짜증을 내면 안 됩니다. 그것은 스스로 “나는 나이 들었소.”하고 말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과 젊은이들은 그 긴 시간을 기다리면서 자기들끼리 재잘거리며 즐겁습니다. 그 짧은 스릴을 맛보기 위해 그렇게 긴 줄을 섭니다. 공부를 그렇게 하면 다 성공할 것 같았습니다. 왜 그들은 그렇게 기다릴 수 있었을까요? 앞에 있는 즐거움 때문입니다. 잠시 후 스릴을 맛볼 수 있는 것이 보장되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소망의 분위기가 가득한 곳에 있는 것 자체가 그들의 즐거움이 된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 듯이 보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이지요.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포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이 벽에 “Hope is no where(희망은 아무데도 없다).”라고 모든 걸 포기하듯이 써놓았습니다. 다음 날 그 글은 누군가에 의해서 이렇게 변해 있었습니다. “Hope is now here(희망은 지금 여기에 있다).” 단지 “where”의 “w”를 떼어 앞의 “no” 뒤에 붙이니 “no where”가 “now here”로 된 것이지요. 희망과 절망은 서로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생각의 선택이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기다림은 즐거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패와 상처, 암울한 환경까지 최선을 위한 재료가 됨을 믿는 사람은 때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중도에 포기하거나 짜증내며 돌아서면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어도 결국 빈손이 되고 말지요.

 
작성자
마중물
작성일
2010-08-22 09:55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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