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20220411 - "칼을 칼집에 꽂으라"(요18:1~11)

녹화된 남한 방송을 북한에서 몰래 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남한의 앵커들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뉴스를 전하는 모습이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졌다는 탈북민의 말도 들립니다. 북한 공영방송의 앵커들은 말투가 전투적이고 사용하는 단어가 매우 거친 것을 넘어 욕설도 서슴치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남한도 예전에는 북한을 향해 멸공이니 박살이란 거친 말을 마구 퍼부었습니다. 중학생 때 반공 웅변대회에 어른이 써준 원고를 가지고 나갔는데, 그 어린 것의 입에 담기 민망한 폭력적인 표현들이 가득했습니다.

폭력은 폭력을 낳습니다. 헐리우드 액션영화를 보면 선한 사람과 악당을 극명하게 대조시켜 결국 악당을 "박살"낼 때 통쾌함을 느끼게 합니다. 물론 악을 응징하여 정의를 세운다는 것인데, 그 과정에 무고한 사람들도 살상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차로 악당을 추격하는 장면이라 할 때, 도로를 역주행하기도 하고 다른 차들이 추돌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죽었는지 중상을 입었는지는 카메라가 담지 않습니다. 악당만 죽이면 됩니다. 정의라는 이름의 폭력입니다.

겟세마네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신 후 예수님은 제자 유다가 앞장 서 데려온 불량배들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3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제자의 배신은 예수님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유다를 저주하거나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안타까워하시며 연민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은 불량배들에게 스스로 자기를 밝히시면서, 제자들은 손 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에도 사랑하는 제자들을 보호하시고, 자기 사람들을 하나도 잃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에서 폭력성을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자 베드로가 칼을 휘둘러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쳤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것까지 참으라"하면서 그 귀를 고쳐주셨습니다(눅22:51). 그리고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셨습니다.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한다는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보복의 칼, 미움의 칼, 폭력의 칼을 그 칼집에 다시 꽂아야하겠습니다. 예수님처럼 될 수는 없지만, 그를 닮아가야 하겠습니다. 나의 힘으로, 나의 좁은 마음으로 할 수 없으니 성령의 힘을 의지하도록 기도해야하겠습니다. 주님의 음성에 다시 귀를 기울입니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칼을 칼집에 꽂으라"(요18:1~11)

작성자
이인호
작성일
2022-04-11 09:12
조회
1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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