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20210603(목) - "하나님께 묻는 성도"(잠언18:1~12)
오늘 말씀 1절은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이고,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한다고 말씀합니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라는 표현과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는 표현은 결국 악, 악행으로 귀결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17절에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21절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합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쇠사슬에 의해서가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의 의지의 쇠사슬에 의해 묶여 있었습니다. 원수 마귀가 내 의지를 지배하여 그것으로부터 쇠사슬을 만들었고 그 쇠사슬에 의해 나는 묶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내 의지가 왜곡되어, 육욕/탐욕이 생겼고 육욕을 계속 따름으로 버릇/습관이 생겼으며, 그 버릇을 저항하지 못해 필연/중독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을 쇠사슬의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나를 노예의 상태에 강하게 붙들어 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없고, 죄를 짓지 않으려는 것도 할 수 없고, 죄를 지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전혀 경외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2절에서 말하는 미련한 자입다,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합니다. 결국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바로 하나님께 묻지 않는 사람입니다. 창세기 13장에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서로 갈라지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롯도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결국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택했고,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묻고 롯의 가정을 구하게 됩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께 묻지 않을 때는 절망과 패배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오늘 말씀 6절에도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킨다, 7절에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호와께 묻는 자는 3절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 특히 10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그런데 갑자기 11젤에 부자의 재물이 나옵니다. 부자의 재물이 그의 견고한 성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을 읽을 때 이와 같은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신약의 해석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17절에서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령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지혜로운 부자에 대해서 예수님의 뜻을 해석합니다.
결론적인 말씀은 12절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자기의 소욕을 따르는 자은 교만과 멸망, 하나님께 묻는 성도는 겸손과 존귀입니다. 오늘도 순간순간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쇠사슬에 의해서가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의 의지의 쇠사슬에 의해 묶여 있었습니다. 원수 마귀가 내 의지를 지배하여 그것으로부터 쇠사슬을 만들었고 그 쇠사슬에 의해 나는 묶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내 의지가 왜곡되어, 육욕/탐욕이 생겼고 육욕을 계속 따름으로 버릇/습관이 생겼으며, 그 버릇을 저항하지 못해 필연/중독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을 쇠사슬의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나를 노예의 상태에 강하게 붙들어 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없고, 죄를 짓지 않으려는 것도 할 수 없고, 죄를 지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전혀 경외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2절에서 말하는 미련한 자입다,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합니다. 결국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바로 하나님께 묻지 않는 사람입니다. 창세기 13장에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서로 갈라지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롯도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결국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택했고,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묻고 롯의 가정을 구하게 됩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께 묻지 않을 때는 절망과 패배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오늘 말씀 6절에도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킨다, 7절에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호와께 묻는 자는 3절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 특히 10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그런데 갑자기 11젤에 부자의 재물이 나옵니다. 부자의 재물이 그의 견고한 성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을 읽을 때 이와 같은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신약의 해석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17절에서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령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지혜로운 부자에 대해서 예수님의 뜻을 해석합니다.
결론적인 말씀은 12절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자기의 소욕을 따르는 자은 교만과 멸망, 하나님께 묻는 성도는 겸손과 존귀입니다. 오늘도 순간순간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작성자
석광호
작성일
2021-06-03 08:52
조회
3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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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 100054-55-001851 (예금주 길가에교회) *계좌이체시 헌금을 구분해주시고 주민번호 뒷자리를 써 주세요. (예: 십일조헌금: 십+ 주민번호 뒷자리 주일헌금: 주+ 주민번호 뒷자리 감사헌금: 감+ 주민번호 뒷자리 선교헌금: 선+ 주민번호 뒷자리)
아멘!!!
우리 안에 선한 의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만들어 주십니다.
어거스틴의 고백이 빛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듯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께 여쭙는 마음을 가지면서
상대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 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리라 생각해 봅니다.
전에 TV로 동물의 왕국을 자주 보았지요.
들소든, 얼룩말이든,,,,
앗 차! 하는 사이에 무리에서 떨어진 개체들은
노리고 있던 배고픈 사자들에게 쉽게 타깃이 되었습니다.
신앙공동체 안에도 자기 소욕과 교만에 의해 '스스로 갈라지는' 적극성으로
공동체를 어렵게 하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앗 차!' 하는 순간에 멀어져 가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 잠언에도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는
말이 있습니다. (三人行, 必有我師 : 공자 논어)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 보다 못한 사람이 있고,
나 보다 잘난 사람이 있다,,,,는 구도 속에서 얻는 지혜. 통찰력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세계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三人行, 必有我師 에도 겉으론 겸손한 듯 하나 높아져 있는 나의 자아와 교만이란게
얼마든지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이 관계성을 해칩니다. 은혜를 무시합니다.
은혜의 법정적 선언이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구제불능' 입니다.
'앗 차!' 하는 순간에 멀어져 가는 일이 없도록 우리 피차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잘 위로 할 줄 알고, 또 잘 위로 받을 줄 아는 겸손과 사랑의 공동체를 바라봅니다.
아멘!!!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말씀과 율법을 따르면 절대로 의인이 될 수 없는 저를
의인으로 여겨 주셔서 여호와의 견고한 망대로 달려 갈 수 있도록 하신
예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여전히 죄와 은혜의 경계에서 헤매고 있지만
주신 약속 믿고 은혜 안에 들어 갑니다.
// 십자가의 은혜 안에 또 한번 경건한 삶에 도전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