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20201001 - "탄식과 확신"(고후5:1~10)

사는 것이 팍팍하고 힘들 때 우리는 탄식하며 차라리 빨리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편안해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밖으로는 고난과 박해, 안으로는 교회의 여러 문제와 바울 자신의 사도성에 대한 공격에 바울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바울도 탄식합니다. 탄식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탄식의 끝에서 그저 절망과 마주하며그냥 훌훌 다 벗어버리고 소멸하고 해체되는 파괴적인 방향이 아닌 오히려 창조와 회복 생성의 방향을 지향합니다.

죽을 사람은 이제 더이상 필요 없게 될 자신의 물건을 정리해버리고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침에 일어나 기운을 차리고 일하러 나가는 사람이 옷을 챙겨 입는 것처럼 오히려 무언가 덧입고자 합니다. 훌훌 벗어버리고 죽음에 삼켜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의 몸을 덧입고 생명에 삼킨 바 되려 합니다. 왜입니까? 천국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얼른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을 간절히 원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의 시간 동안에 혹여 탄식할 때에라도 간절히 사모하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힘을 쓰는 것입니다.

누구나 힘든 일들에 탄식하고, 또 누구나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나 탄식하지만 절망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오늘 부활의 소망으로 다시 한 번 덧입고 떨쳐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작성자
이순혁
작성일
2020-10-01 23:46
조회
2687
전체 1

  • 2020-10-02 18:34

    베트남에서 다니고 있는 "광림선교센터"에서는 "생명을 삶"으로 QT 나눔 게시판을 운영하고 있는데, 오늘 말씀이 예레미야와 그다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친바벨론파처럼 보였던 그들에게 바벨론 왕은 그다랴에게 총독직을 맡기고, 예레미야도 편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기로 약속합니다. 친애굽파가 집권했던 당시에 남유다 입장에서는 나라를 팔아 먹은 매국노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그제 "나훈아 콘서트" 중
    “저는 옛날 역사책을 보든 살아오는 동안을 보든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 이 나라는 바로 오늘 여러분이 지켰다”라는 발언이
    신선한 파장을 주는 것은 그가 좌로나 우로 치우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레미야/그다랴/바울 모두 국가/정치/성향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았기에, 그들의 말에 힘에 있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향력이 있지 않았을까요?

    살다보니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그 뜻을 찾기가 너무도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고, 그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소신에 따라 움직이는
    그런 신앙인이 되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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